'이제는 먼 옛날일처럼 기억되지만 한때는 '번안곡'이라 불리던, 그러니까 외국곡을 (종종 공식적인 허락없이) 리메이크해 국내에 발표하던 썩 자랑스럽지 못한 유행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흔히 커버 송(cover song)이라 불리는 이 같은 행위는 늘 수동적인 팔로워의 입장에 서 있던 가요의 위상, 달리 표현하면 영미팝과 가요의 위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기도 했다. 90년대를 지나면서 젊은 감각의 세련된 가요들이 한국에도 넘쳐나기 시작했고, 한국 음악은 서서히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로부터 30년, 이제 우리는 글로벌 케이팝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여기, 한국대중음악의 새로워진 위상을 증명해줄 흥미로운 사례가 등장했다. 필자에게는 90년대 가장 아름다운 사랑노래 중 하나인 "I'll Be There"의 주인공, 이스케이프 클럽(The Escape Club)이 박영미의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을 커버한 것이다. 1980년대 영국발 뉴웨이브와 얼터너티브 록의 유행을 상징하는 그룹과, 비록 의미는 다르지만 90년대 가요계의 새로운 물결(new wave)을 상징하는 R&B/소울 가수인 박영미의 만남이라니 단순히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이스케이프 클럽이 수많은 90년대 가요 명곡중에서도 유독 이 곡의 매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하니 '모던함'에 대한 감수성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들은 단순히 노래를 다시 부른 것이 아니라 영국 팝의 감성과 작법을 녹여내어 예스러운 가요적인 색채를 많이 지웠고, 거기에 원곡에는 없던 후렴구를 추가해 베테랑 그룹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놀라운 일이다. 시대를 앞서나간 90년대 가요가 전성기를 지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영국의 록그룹에 의해 세계 시장에 걸맞은 글로벌한 감성의 케이팝 아닌 케이팝으로 재탄생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모든 음악은 연결된다. 글, 김영대 (음악평론가) [CREDIT] Produced by Ian Curnow Lyrics by Trevor Steel, 김성호 Composed by 김성호 Arranged by Ian Curnow Original Song by 박영미